

그러던 어느 날, 그렇게 간신히 자리 잡았던 우리 집의 평화가 덜컥 깨져버리는 일이 발생했다. 아버지가 겨우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불치병을 얻으신 것이었다. 의사는 냉정하게 시한부 생명을 선언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갓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나로서는 해 드릴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몇날 며칠을 고민했는지 모른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다시 교회에 나가실 것을 권했다.
"아버지! 다시 교회에 나가시는 게 어때요?" "왜? 내 병은 못 고치는 거냐?" "아니요, 아버지 마음이 조금이라도 편안하셨으면 해서요." "싫다! 이제 와서 무슨 낯으로…." 나는 크리스천은 아니었지만 헌금을 많이 해야만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강퍅하신 성격 탓에 신앙을 접으셨다고 믿고 그렇게 권했지만 끝내 외면하셨다.
신앙의 힘으로 아버지가 다시 마음의 평화를 얻지 못한다면 물질적으로라도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었다. 고민 끝에 아버지가 치료받는 곳을 도시의 큰 병원으로 옮겼다. 그리고 할부로 자동차를 샀다. 당시 내 월급이 46만원이었는데 차값을 21만원씩 20개월 동안 갚기로 했다. 아버지께는 회사에서 차가 나왔다고 말했다. 자가용을 타고 고향 집을 찾는 사람들을 크게 출세했다고 부러워하시던 분이라서 조금이라도 자부심을 느끼게 해드리고 싶은 생각에 술술 거짓말이 나왔다.
아버지는 기분이 좋으신지 치료를 받으러 갈 때 내가 당신을 태우러 차를 몰고 오길 바라는 눈치셨다. 나는 말단 사원이었지만 월차휴가를 내고 아버지를 모시러 갔다. 마치 내가 자가용 기사처럼 작은 차의 뒷좌석을 최대한 넓혀 정성껏 모시고 다녔다. 아버지는 아시는 분을 볼 적마다 차를 세우게 하고 아들 회사에서 나온 차로 병원에 간다며 자랑하셨다. 그럴 때마다 아버지 모르게 목울대가 울렁거렸지만 이렇게라도 하길 잘했다는 생각에 빚 덩어리 차일망정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아버지는 내 차를 겨우 세 번 타신 후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나셨다. 그나마 한 번은 영정사진으로 타셨다. 그래서 가셨지만 보내드릴 수가 없었다. 내 차를 타신 세 번 중 한 번만이라도 항암치료를 받으러 가는 길이 아니라 소풍이었다면 모를까, 도저히 억울해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흐르다 굳어버린 눈물 자국 위로 계속해서 눈물이 흘러서 그리다 만 유화처럼 얼룩져 갔다. 그래도 지우고 싶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세상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라서 남의 이목 따위는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혹시, 그날 어머니가 태워 버린 성경 책 탓은 아닐까, 회한의 장면들이 되풀이되었다.
어느덧 그로부터 세월은 이십 년도 더 흘러 이젠 차 없는 사람이 없다시피 한 세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세상이 달라졌다고 마음까지 달라지는 건 아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누군가의 아버지는 아들의 차를 타고 다녔으면, 하고 바랄지도 모른다. 요즘 젊은이들은 자신도 아버지가 되면서 정작 자기 아버지 마음은 모르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아들 귀한 줄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면서 아버지 귀한 줄은 가르쳐줘도 몰라서 안타깝다. 이제 며칠 후면 스물한 번째 아버지 기일이다. 이번 제사에는 아버지 영정사진 앞에 성경책을 한 권 놓아드릴까 한다.
백두현 / 박달재LPC 관리이사